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암리 학살사건 (문단 편집) == 전개 == 4월 5일 일본 [[육군]]은 수촌리에 들이닥쳐 만세시위 주동자를 색출한다면서 주민들을 마구 학살하고 마을 가옥 42호 중에서 38호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수촌리에서 교회당이 불타고 사람들이 죽거나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개신교 선교사들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수촌리를 찾았다. 이들 중에는 [[영국]]계 [[캐나다]]인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1889년]] [[3월 15일]] ~ [[1970년]] [[4월 16일]], 한국명 [[석호필]])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4월 5일 발안 장날이 되자 만세시위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이러자 일본 육군은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육군 헌병[[중위]]가 지휘하던 부대를 4월 13일 제암리로 보내 만세시위운동 주모자들을 색출하도록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아리타 중위는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모두 교회당으로 모이게 했는데 "만세시위 진압 과정에서 너무 심한 매질을 한 걸 사과하러 왔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파일:external/contents.history.go.kr/img_168_01.jpg]] 이미 아리타는 사사키 등을 통하여 제암리 개신교인들의 명단을 확보했고 아리타가 교회당을 나서는 것을 신호로 일본군은 교회당에 사격을 시작하는 동시에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는데 이로 인해 민가 28채가 소실되었다. 바람이 거세 교회당 아래의 민가로 불이 번졌고 교회당 위쪽으로는 일본군들이 불을 질렀다. 일본군이 교회당 안에 있던 사람들을 못 나오게 하려고 문에 못질을 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공식적인 기록에는 문을 잠근 것으로만 되어 있다. 탈출하다가 사망한 사람들은 벽을 부수고 탈출했다고 한다. 한 여인이 아기를 창밖으로 내보내며 살려달라고 하자 칼로 찔러 죽였다고도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제암리 학살 사건에 대한 공식 기록에 의하면 교회당 안에 모인 사람들은 15세 이상의 남자들 22명이다. 교회 안에 들어갈 때 키를 재서 총의 길이보다 키가 큰 사람들만 들어가게 했다고 한다. 19명이 교회당 안에서 사망했으며 3명이 교회당에서 탈출하던 중 2명은 사망하고, 1명은 산으로 피신하여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가족을 찾아 교회로 달려오는 부인 2명이 죽기도 했다.[*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뒤쪽 언덕에 이 때의 순국선열 23인의 합동묘지가 있다.] 다음날 일부 군인들은 고주리로 가서 화성지역의 천도교 지도자였던 김홍렬의 일가족 6명도 살해했다. 불 탄 집에 들어갔을 땐 '''"...이게 니 뼉다구인지 내 뼉다구인지도 모르겄고..."'''[* 제암리 학살사건 목격자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 참고로 제암리 학살사건의 최후의 생존자로 1992년 11월 10일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94세]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말 그대로 참혹 그 자체였다.''' 양일간 제암리 교회에서 23명, 고주리에서 6명이 학살당했다. 현재도 남아 있는 제암리 교회에서 영상물과 교육자료 등을 통해 제암리 학살사건 당시의 내용을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가끔 시간만 잘 맞추면 당시 생존자의 후손들도 종종 만나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